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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핀란드

[핀란드의 페미니즘] 일상이 페미니즘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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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싱키 트램 안의 내리는 버튼

 

 

핀란드의 낯선 풍경들 중 하나는 유모차이다. 사람들은 어디서나 유모차를 끌고 다닌다. 평일 오후에 유모차를 끌고다니는 사람들 중 절반은 남성이다. 아빠들은 삼삼오오 유모차를 끌고다니며 한가롭게 공원을 거닐거나 카페에서 수다를 떤다. 공원 놀이터에서도, 식당에서도, 쇼핑몰에서도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남성을 보는 것이 흔하다. 대중교통은 유모차를 끌고다니는 사람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시설이 설비되어 있다. 트램 안에는 유모차를 위한 좌석이 따로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행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 괜한 눈치를 받을 수도 있다. 가장 부러웠던 것은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은 대중교통비가 무료라는 사실. 유모차를 싣고 부랴부랴 지갑을 꺼내 교통카드를 찍고, 버스 출발이 늦어져서 괜히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아이를 데리고 나오면 맘충이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핀란드에 가게되면 무슨 말을 하게 될까? 사뭇 궁금해진다.

 

핀란드의 성평등 역사에 대해서 고찰해보려면 1906년으로 돌아가야한다. 1906, 핀란드에서 세계최초의 여성국회의원이 탄생했다. 러시아의 지배 하에서 실시한 핀란드 의회의 첫 번째 선거였다. (1906년 이전의 국회는 신분에 기초한 신분제의회였다. 노동자들은 신분제의회의 철폐를 주장하는 다양한 운동을 펼쳐나갔다.) 근대의 단원제의회로 전환이 되면서 실시한 첫 선거에서 19명의 여성국회의원이 탄생했다. 당시의 의석수는 모두 200이었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핀란드에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가 계급에 상관없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핀란드 여행 중 성평등과 관련해 방문한 단체는 유니오니(Unioni)였다. 최초의 19명의 국회의원 중 한 명인 루치아 해그먼이 창립한 여성주의단체이다. 정식명칭은 Feminist Association Unioni (여성주의연합) 이다. 1892년 설립된 유니오니는 올해로 125살을 맞는다. 핀란드 독립의 역사보다도 나이가 많다. 노동자계급의 참정권 운동과 더불어 주도적으로 여성의 참정권운동을 펼쳐나간 단체이다.

 

루치아 해그먼과 18명의 여성국회의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성평등을 위한 법개정과 시도들을 했다. 남자와 여자가 더 이상 분리되어 교육을 받지 않게 되었고, 지방선거에서도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었다. 1930년에 해제된 결혼법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권리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는 법적장치가 되었다. 남성 가장이 여성의 후견인이 되는 제도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193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모성수당 및 육아관련 법률이 제정되면서 여성의 사회진출에 대한 제약을 완화시키고 사회진출에 대한 제도적 보완을 한다. 남성들이 평일 오후에 유모차를 끌고다닐 수 있는 것도 육아휴직 등 다양한 제도로 그 권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엄마이기 때문에, 여성이기 때문에, 급여가 남편보다 적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지 않아도 된다. 1992년에는 국회의원 쿼터제가 실시된다. 이 제도는 남녀상관없이 40%의 의석수를 보장하는 제도이다. 한국에서 여성할당제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과는 다르게 핀란드는 지방의회까지 확대시켰다. 지금 이 제도는 오히려 줄어드는 남성의원들의 의석수를 보장해주는 제도가 되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다른 방향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도록 하는 제도로 자리잡았다. 2004년 제정된 차별금지법은 나이, 민족, 국적, 언어, 종교, 신념, 의견, 건강, 장애, , 개인의 특성에 기반한 모든 차별을 금지한다. 핀란드국민의 70%가 믿는 루터교의 주교의 자격으로 여성도 가능하다는 것을 2010년 법제화를 통해 이루어냈다.

 

그러나 제도의 완비만으로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아니다. 여성단체 유니오니는 제도와 더불어 성역할에 대한 인식에 균열을 내기 위한 노력들을 했다. 70년대의 오픈대학에서는 남성들만의 일이라고 여겨졌던 차량정비 등에 대한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유니오니의 활동은 여성폭력, 아동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인지적교육, 법률상당 등 다양한 범위를 아우르고 있다. 최근에는 성평등을 넘어서 반인종주의 운동도 함께 벌이고 있다. 페미니즘운동이 평등을 지향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이유이다. 특히, 이민자여성의 경우 받는 차별은 더욱 심하다.

 

이렇게 완벽한 제도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핀란드에도 과제는 있다. 2017년의 통계에 따르면 여전히 여성의 임금은 남성보다 17% 적다. (우리나라의 경우 36%). 여전히 핀란드의 많은 여성들이 폭력피해경험을 갖고 있으며 이민자여성의 경우는 그 비율이 더 높다. 취학이전 모든 아동에 대해서 어린이집이 전일양육을 책임지던 제도도 바뀌어서 부모 중 한명이라도 실업상태이거나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고 있다면 아이를 돌 볼 시간이 있다고 가정해서 일을 하는 시간 동안만 국가가 양육을 책임진다. 우파정권이 들어서면서 제도가 퇴행한 것이다. 제도는 지키지 않으면 쉽게 무너진다. 그래서 125년의 역사를 가져도, 좋은 제도와 사회의 인식을 변화시켜도 유니오니와 같은 여성단체는 없어질 수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받아온 차별의 역사를 쓰라면 책 한권을 거뜬히 쓸 대한민국의 여성들을 생각하면 씁쓸해진다.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 역차별로 읽히고 더욱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기도 한다. 125년의 역사를 가진 Unioni가 걸어온 길을 톺아보면서 우리의 힘도 길러졌으면 한다. 제도와 사회인식의 변화를 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대한민국의 페미니스트들 만세다. 우리는, 차별을 차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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